《녹색평론》제110호 2010년 1-2월호   


  포기를 통한 행복의 추구
  김종철

사랑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  ― 허버트 매케이브

 녹색성장’이라는 거짓말
최근에 제가 몇몇 모임에서 ‘녹색국가는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우리는 국가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사유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전제로 하고 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과연 국가라는 게 그 근본적인 성격상 녹색적 가치와 친화하거나 심지어 양립 가능한 것인지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지금 녹색성장이라는 말을 한국정부가 거침없이 쓰고 있는데, 한마디로 가소로운 일이지요. 어디서 녹색이라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녹색적 가치를 정책을 통해서 실천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입만 열면 녹색 운운하고 있어요. 원자력발전을 녹색에너지라고 맘대로 규정하고, 4대강과 그 유역을 전면적으로 파괴해버릴 게 확실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녹색뉴딜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민심과 어긋난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경제정책에 매진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위선도 보통 위선이 아니지요. 하기는 이런 위선이나마 이 정부가 보여준다는 게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지요. 원래 위선이라는 것은 거짓이 진실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행위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정부가 비록 진심이 아닐망정 녹색을 들먹이는 것은 그래도 이 정부가 정말 존중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식별력은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지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셈이니까요. 문제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거죠. 그것도 너무나 태연히 거짓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갈수록 권력주변의 언어가 타락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 나라의 교육, 문화를 포함한 정신적·도덕적 삶의 척도가 혼란스러워지는 게 제일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녹색이라는 말을 가급적 안 쓰려고 해요. 제가 발행하는 잡지가 녹색평론인데, 녹색이라는 말이 이렇게 오염돼버린 상황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세상에는 중요한 게 많지만,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말이고, 언어생활이에요. 말이 지나치게 남용되거나 오용되면, 다시 말해서 거짓말이 범람하게 되면 인간다운 삶의 윤리적 기초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지금 녹색이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해대는 사람들이 하도 혐오스러워서 그만 잡지 이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참 난감합니다.

아무튼 지금 정부의 후안무치함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일하는 것마다,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마다 반녹색적, 반민중적, 반민주적인데도 불구하고, 녹색을 가장하고, 친서민 운운하니 가당치도 않지요. 그런데 이런 정부를 우리는 계속해서 비판해야 하지만, 조금 물러나서 냉정히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 속에서 과연 녹색국가임을 진정으로 말할 자격이 있는 국가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근대국가라는 틀 속에서 녹색적 가치가 과연 실현가능한 것인가, 혹은 근대국가의 논리와 녹색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아직 이 문제에 관해서 깊이있는 공부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뭐라고 섣불리 말한다는 게 두려워요. 그러나 이것은 워낙 중대한 문제이기에 부족한 실력을 돌아보지 않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앞으로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지만, 우선 여러분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서의 행복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우화 하나를 가지고 말머리를 꺼내볼까 합니다. 어떤 남자가 고요한 바닷가에 앉아서 평화롭게 낚시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하는 말이,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낚싯대 하나 걸쳐놓고 고기를 잡고 있느냐고 그래요. 이 이야기 여러분들 대개 아시죠? 알고 계시겠지만, 이야기 진행상 필요할 것 같아서 되풀이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낚시질하던 사람이 묻습니다. 그러니까 지나가던 사람이 그물을 쓰셔야지요 하고 말합니다. 그물을 쓰면 한꺼번에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지 않느냐고요. 그래서 그 낚시꾼이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서 뭐가 좋으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걸 팔아서 돈을 많이 벌어 큰 배를 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원양어업을 본격적으로 할 수도 있을 거고. 낚시하던 사람이 또 묻습니다. 원양어업을 해서 뭐 할 건데요? 행인이 말합니다. 그러면 큰 수산회사 사장도 되고, 회장도 될 수 있다고. 그러자 또 낚시꾼이 묻습니다. 큰 회사 회장님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아니, 나중에 은퇴해서 편하게 살 수 있지 않느냐. 어떻게 편하게 사는데? 고요한 바닷가에 나와서 낚시질을 하면서 지낼 수 있지 않겠느냐. (웃음) 내가 바로 지금 그러고 있지 않느냐.

지금 우리들이 사는 꼴이 대체로 이런 식이에요. 우리는 늘 장래를 위해서 뭔가 준비를 하는 게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단 한번도 지금 여기서 현재의 삶에 집중해서 살고 있지 않아요. 늘 준비를 하면서 진짜 삶이란 언젠가 미래에 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미래는 절대로 오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좀 보세요.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가릴 것 없이 그때그때 성장단계에 어울리는 아이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향유할 여유가 없어요.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하루에 학원 5개를 다녀야 하는 나라예요. 그래서 그 아이의 소망이 뭔가 하면 죽고 싶다는 겁니다. 죽으면 학원에 안 다녀도 되니까. 이 얘기는 녹색평론 지난호 서문에서 제가 인용했는데, 기억나시죠?

이건 예외적인 게 아니라 오늘날 전형적인 우리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아이들만 이런 게 아니지만, 어쨌든 아이들의 삶을 이렇게 망가뜨려놓은 것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나라 어른들 이러고도 아이들의 어버이, 보호자, 교육자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양심이 있다면 다들 석고대죄를 하든지 자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이렇게 해놓고 무슨 경제발전, 사회개혁, 통일을 한다는 거예요. 참혹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이명박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희망이라도 있지요. 다음 선거에서 갈아치우면 되니까. 또 아무리 이명박이 엉터리 짓을 하더라도 3년 후에는 어차피 청와대에서 물러나올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 대통령을 하고 어느 정파가 집권을 하건 이 문제는 풀릴 것 같지가 않아요.

그 문제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지금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10년 후, 20년 후에 어른이 되거나 더 늙어서 은퇴한 뒤에 행복한 삶이 올 것이라고 막연히 기다리다가 인생을 다 망쳐버려요. 한번도 행복을 진정으로 누리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해버립니다. 일반적으로 현대문명사회 특히 산업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람들이 제일 심한 것 같아요. 참 어려운 문제예요. 그래도 지금 우리사회에서 제일 생각을 많이 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사회운동가나 시민운동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에 거부감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마치 여유있는 사람들의 사치품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희생이라는 생각에 경도되어, 자기희생적인 행동을 존경하는 습관이 뿌리 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희생을 왜 해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제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게 자기희생이에요. 누가 희생하라고 했어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무슨 어려운 일을 자청해서 좀 했다고 해서 자기희생을 한 기분을 느낀다면 사실 그런 일 안하는 게 나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에 적지 않지요. 자기를 희생했다는 기분이 있는 이상,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뒤따르고, 그게 자기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괜히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우리가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으로부터는 탄압을 각오해야 하고, 일반대중의 몰이해에 부딪칠 가능성을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약간의 역풍이 불어도 금방 나약한 심정이 되어 나는 나를 희생하면서 이 사회를 위해 일해왔는데,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야속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가치있는 사회운동이라도 그게 재미있어서 해야지 의무감에서 한다면 결국 자기희생이라는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 결과로 인생이 누추해지는 거예요.

사회운동도 결국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면 운동하는 사람 자신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할지라도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하기에 따라 우리 각자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게 가능합니다. 이명박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말도 안돼요. 그건 우리 자신을 등신 취급하는 얘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 아이들의 경우라면, 첫째 대학 가는 걸 포기하면 돼요. 간단하잖아요. 온갖 무리를 하면서 부모나 아이들이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누구나 대학에 가야 된다는 강박적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제 말이 틀렸어요? 대학 안 가기로 한다면 당장에 행복해질 수 있어요. 이 간단한 원리를 왜 모를까요? 대학 안 가기로 맘먹으면 아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스러워지겠어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배우자 만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 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막연한 생각에 매달려서 인생 전부를 희생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항변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입시제도와 교육제도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지 어떻게 대학 안 가기가 해답이 될 수 있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 방향으로 계속 노력해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틀림없이 헛된 노력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이 고약한 입시와 교육제도는 부분적인 땜질은 끊임없이 가해지겠지만, 근본적인 골격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층의 이익이 이 제도의 존속과 너무나 긴밀히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삶을 완전히 망쳐놓는 한이 있어도 이 사회의 기득권층은 절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설령 나라 전체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요. 미국으로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정말로 혁명적인 정치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혹시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가 계속되는 한, 그것은 국내외의 역학관계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 날이 온다 하더라도, 그동안 망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인생은 무엇으로 벌충할 수 있을까요?

 

인생은 준비하는 게 아니다

제가 녹색평론 발간을 시작하고 난 뒤에 잡지에 실었던 글을 처음으로 엮어 《간디의 물레》라는 책을 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대개 그냥 상투적으로 생태학적 관심을 표명한 책이라고 이해하는 모양입디다만, 어떤 문학평론가가 그 책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이 책은 사람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고 있는 책이다”라고 썼더군요. 저는 그때 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과연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 마음을 읽은 것이지요. 사실 제가 녹색평론 펴내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거든요. 보통 생태운동가라면 지구를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금욕을 싫어합니다. 왜 금욕을 해요? 신이 우리를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냈을 때는 우리더러 금욕하라고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혓바닥에서 왜 그렇게 맛이 있어요? 금욕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당연히 맛이 없어야죠.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도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괜히 채식주의니 뭐니 그런 것 고집하지 말고. 사람들하고 같이 재미있게 둘러앉아 밥 나누어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인생사업이에요.

요컨대 준비하지 말자. 지금 당장 여기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살자. 아이들도 그런 삶을 갖게 마련해주자. 그러면 우리의 의식도 굉장히 자유로워져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니까 남들에게도 많이 너그러워집니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절대로 남들에게 너그러워지지 못합니다. 예전 한 10년 전에 저를 보다가 요즘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절 보고 얼굴 좋아졌다고 그래요. 사실 제 건강은 늘 좋지 않지만, 1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게 있다면 건강문제로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은 나이도 많이 들었으니까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인지 이 병을 빨리 고쳐서 건강하게 제대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안하게 돼요.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서 준비를 하지 않아요. 그냥 불면증으로 잠이 안 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책을 보고 있으면 결국 잠들게 돼요. 잠은 자정 전에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에 좋다 어떻다 하는 관념 자체가 없어지니까 잠이 안 와도 편해요. 저는 운동도 거의 안합니다. 그냥 내가 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주위에 있는 벗들과 재미있게 지내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게 오히려 건강에 좋은 거 같아요.

나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사춘기를 보내는 것을 보면 마음이 굉장히 아파요. 사춘기라는 게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깁니까? 그렇잖아요? 여러분들도 다 그렇겠지만 나는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때가 사춘기였어요. 그리고 지금 나이 60이 넘도록까지 기본적으로 그 사춘기 시절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거, 그거 평생 써먹고 살아온 것 같아요. 그 후 살면서 디테일이 많이 붙었을 뿐이죠. 근본 바탕은 그때 다 정립됐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게 굉장히 싫었어요. 하여간 학교생활이 감옥 같고 그랬어요. 요즘 학교에 비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인데도 그랬어요. 그때 우리에게는 학원 같은 것도 없고, 과외도 특별한 경우 빼놓고는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서울에서는 이미 학원이 번창하고 있었지만, 내가 살던 지방소도시는 아무튼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 무렵은 대학 진학하는 학생들이 자기 또래 중에서 정말 얼마 안되는 숫자였어요. 대학 진학 안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물론 대학이 많지 않아서 입시경쟁이 심한 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별로 큰 압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더구나 내 경우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아예 대학에 가면 미당 서정주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미당이 재직하고 있던 동국대학교 국문과의 그 당시 입시과목이 국어와 국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도로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어요. 내가 그 당시에 미당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친일문제 자체에 대한 의식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오직 미당을 시의 대가로 알고 있던 시절이었지요. 나중에 대학입시 직전에 진로를 바꾸는 바람에 내가 서정주 선생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고등학교 때 내가 입시의 중압 때문에 괴로워한 기억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이 지옥 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헤르만 헤세가 쓴 《수레바퀴 밑에서》 같은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거기 수도원 학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괴롭게 지내는 주인공과 같은 기분이 되어 지냈어요. 사실 우리학교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랬어요. 나도 수레바퀴 밑에서 짓눌려 지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사춘기라는 게 그렇게 예민한 시절이에요. 세계명작소설을 읽다보면 연애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주인공 남녀가 처음 만나서 사귀다가 키스하고 그럴 때 마치 내 자신이 당사자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못 이루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감정은 몇년 지나서 완전히 사라져버려요. 사춘기만의 특권적인 감수성인 거예요. 남들의 이야기를 그게 픽션이든 아니든 저렇게 풍부한 감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사춘기적 감수성이라는 것은 결국 신이 만든 겁니다. 그런 감수성은 아무리 돈을 써서 과외를 한다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절대 만들어질 수 없어요.

사춘기란 이렇게 소중한 거예요. 신이 준 선물이지요. 사춘기 시절의 풍부한 감수성 속에서 인간은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행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사춘기를 지금 우리사회와 교육이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하기는 아무리 교육이 엉망이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기는 해요.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일종의 기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면적으로 상처를 받고, 억압된 욕망으로 짓이겨져 있어요.

 

종말론적 상황 속의 정치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현실이 언제 어떻게 고쳐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맨날 정부를 욕하고, 조중동을 욕해봤자 해결책이 안 나옵니다. 한국의 정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모든 사회적 모순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정치의 정상화라는 게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거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치의 정상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해봐야 합니다. 오늘 낮에 어디서 보니까 최모라는 정치학자가 또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당체제의 미비에 있고, 정당체제의 미비는 정당이 노동운동과 연결이 안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군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늘 들어온 얘기지만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 중요한 것은 정당체제가 왜 완비되지 않으며, 노동운동과 연결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정당 내지 정치체제가 완비될 때까지 가령 이 아이들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다가 아이들 다 망가지고 나면 뭐해요? 저는 그렇게 기다리는 거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당장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 사는 게 중요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것은 엘리트들에 의한 지적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위 정상적인 정치가 작동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거예요. 아니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정상적인 정치라는 게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걸 기다려봤자 백년하청입니다. 수천년 동안 기다려봤잖아요. 안돼잖아요. 예수의 가르침이 뭐예요? 쓸데없이 기다리지 말고 지금 여기서 결판내자는 거 아니에요? 예수 시대나 지금이나 종말론적인 상황입니다. 아니, 지금은 문자 그대로 종말론적 상황이지요. 코펜하겐 기후변화 대책 회의를 보세요. 그 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지든 인류의 생존 가능성 자체가 국제회의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사에서도 매우 특이한 사태임에 틀림없지요. 아무튼 우리가 지금 종말론적 상황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코펜하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녹색평론》에서 이 회의에 대해 별로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독자들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저는 《녹색평론》이 환경잡지라고 생각 안하기도 하지만, 코펜하겐 회의 같은 것을 통해서 이 종말론적 상황이 극복되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코펜하겐 정상회의 따위로는 애당초 될 일이 아니죠. 생각해보세요. 국가마다 자신의 국익을 우선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현재의 국제관계에서 국가들 사이의 자발적인 양보와 긴밀한 협력을 위한 틀이 무슨 수로 만들어질 수 있겠어요? 어제 신문 보니까 코펜하겐 회의에 임하는 한국정부의 대책은 ‘자발적 감축하되, 성장에 필요한 만큼은 배출’이라고 나와 있어요. 이런 염치없는 소리가 어디 있어요.(웃음) 소위 세계 전체에서 경제규모가 10위권 언저리에 있다는 국가가 개발도상국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거예요. 한겨레신문 보니까 경원대 김창섭 교수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모든 가구가 한해 21만7천원의 비용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가 없다.” 이 계산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의 결론은 “오직 남은 길은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게 서로 책임을 나눠 갖고 효율적으로 줄여나가느냐 하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묻고 싶어져요. 우리가 누군데? 사람들이 편리하게 ‘우리’라는 말을 잘 쓰는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밤낮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먹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배기가스 배출을 줄이자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심각한 모순이잖아요. 그러면 이 모순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이야기를 해야지, 정체도 불명한 우리라는 주체 아닌 주체의 공동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말이 안돼요. 더욱이 그런 사람들이 현명하게 서로 책임을 나눠 갖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날이 올 것 같아요? 단언컨대 절대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불가능한 얘기예요. 첫째는 우리가 누군지도 몰라요. 강남 부동산 투기꾼과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같은 ‘우리’에 포함될 수 있겠어요? 내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실이에요.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사람들이 현명하게 책임을 서로 나누면서 산다는 것, 절대로 안됩니다. 그게 된다면 사회주의 벌써 성공했게요. 그런 추상적인 희망에 기대를 걸다가는 죽도 밥도 안됩니다. 사실 그런 말 하는 사람 자신도 진심으로 그걸 기대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괜히 자기가 인류대표나 국가대표인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강연을 하면 나중에 질문시간에 “그런 식으로 해서 보편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세상사람 전부를 설득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돼요. 우선 자기가 행복하고 자기 이웃과 벗들이 행복하면 되잖아요. 굳이 남들을 설득하겠다면 몸으로 설득하면 됩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면 돼요. 재미있게 실제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딴 사람들이 “아 저거 재미있겠네” 하는 마음이 생겨서 따라하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거잖아요. 왜 꼭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하는 걱정들을 해쌓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좋고 옳다고 생각하면 동지들과 합심해서 실천해나가면 될 텐데 말입니다.

 

국가의 논리와 녹색가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국가지도자적인 성향이 강해요.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도 언제나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고 살아요. 제가 학교 있을 때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이 더러 있었어요.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 왜 국가로부터 처벌을 각오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결행하는지 학생들이 알 필요가 있잖아요.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도 결국은 못 알아듣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러면 우리나라는 누가 지키는데요?”라고 질문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있어요. 자기가 국방부장관도 아니고 장관의 아들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소박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볼 줄 모르는 거지요. 기본적으로 국민으로서 사고하는 게 뿌리깊은 습성이 돼 있어요. 가수나 운동선수들도 맨날 텔레비전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하잖아요. 전부 국가대표예요. 그러니 늘 불만족스럽고 불행하지요. 왜? 국민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주지 않으니까. 편치 못해요. 가당찮게 다들 위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하고 자기 옆의 친구들하고 같이 재미있게 살 궁리나 하면 될 텐데 말이지요.

자, 그러면 국가라는 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11월 9일자 경향신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지난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한명숙 씨가 서울시내 모처에서 ‘즉문즉설’이라는 형식 밑에서 청중들과 자유롭게 주고받은 문답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기사의 내용 중에 정말 중요한 게 있어서 이것을 오래 보존할 생각입니다. 한명숙 씨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청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조금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어요. “물론 노 전 대통령이 인간적인 분이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는 용서하기 어렵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당시에 우리나라 농민이 500만명이었는데 퇴임할 때는 35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한―미 FTA 등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에게는 재앙을 초래했다. 여기에 대해서 한말씀 해주시오.”

여기서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대통령 그만두고 봉화마을에 내려가서 오리농법하며 농촌 살리는 운동하겠다고 하기 전에 재임 중에 농민들을 살리기 위한 확실한 정책을 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노무현 정부 동안에 우리나라 농민 150만명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저도 몰랐는데, 사실이라면 이건 참 엄청난 실정이라고 해야 합니다. 150만의 농민들이 도시에 와서 일자리를 잡았겠습니까? 불가능한 얘기예요. 농촌이 그만큼 황폐해졌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농촌공동체가 결정적으로 깨졌다는 뜻입니다. 농촌공동체가 깨졌다는 것은 우리 삶의 토대 중의 토대가 붕괴되었다는 뜻입니다. 녹색평론이 지난 18년 동안 내내 해온 이야기가 그거예요.

저는 지금 노동운동이 벽에 부딪친 결정적인 이유도 우리 농촌의 붕괴현상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농업과 공업이 조화를 이루고 발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공업은 어떤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지 말아야 하고요.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소위 눈부신 경제발전을 했다는 한국의 경우는 일방적인 공업화 편중정책을 끝도 없이 편 나머지 완전히 기형적인, 그리고 매우 위험한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공업마저도 대기업, 수출 위주의 공업화가 막무가내로 추진되는 바람에 이제는 대외여건에 취약하기 짝이 없는 구조가 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갈수록 노동운동이 약화될 수밖에 없고,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동안 노동운동이 농촌을 등한시해온 것과 관계가 크다고 저는 봅니다. 노동운동이 농촌과 연대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던 겁니다. 농촌이 부서지고 망가졌기 때문에 한때는 모두 농민의 아들과 딸들이었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돌아갈 데가 없고,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 이걸 잘 알고 있는 자본가들과 국가권력이 노동자들을 계속 몰아붙이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어요. 갈 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요새 늦게나마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과 연대하려는 노동운동 조직이 생겨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농산물만 해도 얼마나 많아요. 생협을 만들어서 농촌과 제휴하여 곡식과 야채 등을 공급받는다면 농민도 살고 노동자들의 건강도 좋아질 거란 말입니다. 그 간단한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니까 그동안 방치하고 있었던 거예요. 최근에 민노총 부산지부에서 생협을 만들어서 이 사업을 시작했다는데 늦게나마 바람직한 방향을 잡았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농촌과 연대해서 아이들도 농촌에 가서 메뚜기도 잡아보는 경험을 하게 하면 얼마나 좋아요.

바로 이겁니다. 막강한 자본과 국가권력을 상대로 우리가 힘으로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권력이라는 합법적인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설 수는 없는 거죠. 우리는 사상으로서밖에 맞설 수가 없어요. 사상이라는 무기말고는 없어요. 그리고 사상이라는 무기를 쓸모있게 하자면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명숙 씨가 어떤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볼까요. 아까 그 농촌정책의 부재를 비판하는 청중의 질문에 대한 한명숙 씨의 답변입니다. “죄송합니다. 역부족이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국정을 운영해보면 한국의 경제적 지위를 수치상으로 상승시키지 않으면 권력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상황이 옵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예요.  

포기를 통한 행복의 추구(2)



  요컨데 경제성장을 계속 해나가지 않으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것을 느끼며 지냈다는 거예요. 그런 두려움 속에서 정부를 운영한다는 겁니다. 이어서 한명숙 씨는 “당장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현재의 구도 밑에서는 농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여유가 국정 속에서는 전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솔직한 얘기예요. 저는 한명숙 씨를 개인적으로 전혀 몰라요. 그런데 이 문답을 보면서 그가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굉장히 순진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음흉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못하지요. 또 자신의 이 발언이 함축하는 바를 깊이 음미해보았다면 쉽게 공개석상에서 이런 말은 절대로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발언은 한명숙 씨가 속한 정파가 재집권을 하거나 혹은 소위 진보적 개혁파들이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농업이 살아나기 어렵다는 뜻이거든요. 농기업이 아니라 소농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은 국가의 경제성장 수치를 높여주는 데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농업은 비교열위 산업이잖아요. 문제는 농업을 단순한 산업으로 보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농업의 근본적인 가치를 정책을 통해서 장려하고자 하는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그룹이 없어요. 민주노동당조차 그렇다고 나는 봅니다. 당명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민주노농당이 아니고 민주노동당이잖아요.

  만약에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집권을 한다면 부분적으로는 약간 차별화된 농업정책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농업의 핵심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을 펴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근대국가라는 게 본질적으로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농업이나 환경 혹은 넓은 의미의 녹색적 가치의 선양에 적극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의 위상이니 품격이니 하는 것에 관해 말하지만, 실제로 문화적 수준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최종적인 발언권은 결국 경제력과 군사력에 달려있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농업을 등한시하고 환경파괴를 계속하는 경제성장을 멈추고 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어떤 정치가나 정당이 유권자들에게 말한다고 해봅시다. 아마 집권은커녕 국회에서 소수의석을 차지하기도 지난할 것입니다. 이게 근대국가의 룰이에요.

  이명박 정부의 첫 국무회의 때 강만수라는 장관이 그런 얘기를 했다죠. 이제 우리나라에서 농업이라는 말은 폐기하고 농산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요. 김대중 정부에서 농림부장관을 지냈던 김성훈 선생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노발대발해 가지고 농민신문에 그 얘기를 쓰셨더군요. 김성훈 장관은 예외적인 분입니다. 강만수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정재계, 언론, 대학, 교육자 중에서 농업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더구나 한국이 지금 산업국가 중에서 식량 자립도가 제일 낮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요.  아무 생각이 없이 두바이를 모델로 해야 한다는 인간들이에요. 이런 무지하고 무책임한 인간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어요. 하기는 아이들을 이렇게 망가뜨리는 교육제도를 수십년 이상 방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게 정말 인간의 마음을 갖고 사는 존재들인가 싶기도 해요. 문제는 양심적인 인간들이 절대로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데 있어요. 가끔 진보정치운동한다는 사람들 만나는 기회가 있는데, 그때마다 그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꿈 깨라고. 당신들 권력 못 잡습니다. 또 만약에 권력을 잡는다 하더라도 당신들이 권력을 잡는 순간 한명숙처럼 돼요. 아무리 생각이 있어도 국가의 논리 때문에 뜻을 펼 수가 없단 말이에요. 불가능한 얘기예요.

  부국강병을 지향하고 소위 국익을 악착같이 챙기는 것은 근대국가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국가에서 모든 사람이 현명해진다면 희망이 있죠. 그런데 그건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요. 사회주의도 성공하려면 세계동시혁명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러시아라는 한 나라에서만 혁명이 일어나니까 부르주아 국가들이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러시아를 포위하고 침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러시아 국가는 자신을 방위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이념과는 전혀 관계없이 군사국가, 전체주의 국가로 점점 국가주의를 강화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거예요. 궁극적으로 국가의 소멸을 꿈꾸는 사회주의가 오히려 국가의 폭력적 기능을 강화하는 역설적인 현실이 생겨난 것이죠. 녹색정치도 마찬가집니다. 세계동시녹색혁명이 일어나야 녹색적 가치가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돼요.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게 녹색이념의 핵심인데, 극심한 경쟁관계에 있는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한 국가가 경제성장 노선을 포기하고 진심으로 녹색적 가치를 실현하겠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언젠가 어떤 기자가 저하고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막걸리 한잔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기자가 “ 선생님 지금 ≪녹색평론≫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이 현실이 되려면 제 생각에는 모든 나라가 동시에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고 말하더군요. 제가 맞다고 그랬어요.

  녹색이상이 현실이 되려면 경제성장도 멈추고 무기도 버려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나라가 군대를 없애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경제성장을 멈추면 자기 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그걸 참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개인은 교양을 쌓으면 자신이 사회적으로 좀 홀대를 당한다고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으로서 자기 나라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집단의 논리, 특히 민족이나 국가의 논리는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양심적 거부운동의 실천



  제가 지금 장황하게 국가의 논리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결국 국가나 국민이라는 개념에 붙들려 있어서는 영구히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국가에 대하여 우리가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할 것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국가는 인간화될 수 없고, 사회적 약자를 섬길 리 없습니다. 국가에 목을 걸고 쓸데없이 정력 낭비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 대신에 지금 당장에 국가와 자본의 논리가 요구하는 것과 다른 인간적인 논리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권력을 잡거나 권력의 도움으로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면 우리는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어요. 국가와 자본의 지배 영역 바깥으로 나가서 자립을 꾀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인의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국가 바깥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요? 양심적 병역거부를 생각하면 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은 사실 실행하기 쉬운 것은 아니지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는 감옥살이를 각오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 정신만은 얼마든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양심적 학교거부도 생각해볼 수 있고, 양심적 병원거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양심적 부동산 투기거부도 좋고, 또는 양심적 취직거부 운동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나 병원이나 현대에 있어서는 모두 산업국가라는 체제를 버텨주는 유력한 기관들이고, 우리가 부동산에 대해 냉담해지고, 대기업 같은 데 취직하기를 거부한다면 이 비인간적인 체제는 결국 무너져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남의 노예가 되지 않고 즐겁게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병역거부는 모르지만, 내가 학교에 안 가고, 병원에 안 가고, 취직을 안 한다고 해서 국가가 나를 체포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어떤 점에서 오늘날 학교나 병원이나 기업은 군대보다도 더 고약한 곳이에요. 그런 거 다 거부하고, 우리들끼리 자립해서 살면 돼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요?

  제가 5년 전에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한 후에 어쩌다 시간이 날 때면 별 볼일이 없어도 가끔 찾아가는 동네가 있는데 경동시장이에요. 대구에 있는 약전골목도 중요한 한약재 시장이지만, 서울의 경동시장은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큰 전통 생약재 시장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경동시장에 가면 꼭 문헌에 있는 약재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민간에서 쓰던 온갖 종류의 풀, 뿌리, 열매, 동물성 생약이 수집되어 있어요. 그 시장에는 또 번듯한 점포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점상인도 많아요. 길바닥에 온갖 약초, 약재를 깔아놓고 팔고 있는 사람은 대개 할머니, 할아버지들인데, 이분들에게 그냥 심심풀이로 무릎 아픈 데 뭐가 좋으냐고 물어보면 금방 겨우살이 같은 약초를 보여주고 그래요. 망설이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경동시장은 건강과 의료에 관한 조선팔도의 오랜 민간의 지혜가 결집되어 있는 곳이에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이 길바닥에서 얻는 지혜가 사실은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저는 아직도 이런 민간약초와 생약 시장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들이 보통 건강과 의료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현대의학이나 한방전문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은 병원 같은 거 없이 살았어요. 우리 조상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보통사람들은 다 자기들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지혜와 기술을 보존하면서 거기에 따라 건강을 돌보고, 병을 치료하면서 살았어요. 별문제 없이 그렇게 잘 살았습니다. 옛날 민간의료가 과학성이 없는 미개한 미신에 근거했다고 하는 현대의학도 따져보면 옛날의 푸닥거리보다 더 나을 게 없어요. 우주와 생명의 비밀을 현대과학이라고 해서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극히 부분적인 지식밖에 없는 거예요. 보세요. 지금 병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질병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암이나 당뇨병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감기도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는 게 현대의학이에요. 그런데도 현대의학은 자신이 가장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것처럼 으스대고, 건강관리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단 말이에요. 일종의 폭력이죠. 그런데 실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국가는 또 제약산업이나 의료산업이라는 게 굉장히 큰 경제적 이익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니까 민간의료를 불법화하고, 현대의학의 독점적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해줍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미국의사협회(AMA)라는 게 있어요. 명칭만 보면 얼핏 국가기관인 것 같지만, 실은 순전히 민간의료업자들로 된 이익단체예요. 그런데 이 단체의 권력이 막강해요. 미국의 의료보험제도 개혁이 잘 안되는 것을 보세요. 보험회사들의 저항도 크지만, 기득세력을 대표하는 미국의사협회의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이 미국의사협회가 생긴 주요한 동기가 뭔지 아세요? 산파를 비롯한 민간의료 기술자들을 박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국가기관이 승인하지 않는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이 현대의학으로 안되는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 멕시코 같은 데로 가서 민간요법이나 자연요법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얘기, 여러분도 들으셨을 줄 압니다.

  현대의학이 실효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제일 큰 문제는 현대적 의료제도 밑에서는 결국 보통사람들이 자신과 이웃들의 건강을 돌보는 능력을 박탈당한다는 점이에요. 본래 우리는 모두 기초적인 의료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그만 탈이 나도 어김없이 병원행이에요.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다 보니까 모든 게 상품이 되었어요. 예전에는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 살면 무상으로 주어지던 지혜와 기술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이 되었어요. 그러니 모두들 필사적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에 점점 우리 자신의 자주적 건강관리 능력이 퇴화를 강요당했어요. 이게 제일 큰 문제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자립성을 잃고, 국가와 자본 밑에서 종살이를 면치 못하는 거예요.

  건강과 의료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도 똑같아요. 원래 사람의 배움은 가정과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면서 쌓인 지혜와 기술을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던 것이었어요. 그런데 근대적 학교제도 속에서는 가치 있는 학습이란 모두 돈을 내고 각자가 학교에 가서 배워야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지식이란 게 학교라는 독점적 기관이 베풀어주는 희귀상품이 된 것이죠. 이반 일리치에 의하면, 오늘날 의사나 교사들과 같은 전문가들이란 사람의 자립적 능력을 못 쓰게 하는 장본인들이에요. 일리치가 ≪탈학교 사회≫나 ≪의료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같은 책을 썼던 것은 그 때문이죠.

  우리가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려면 첫째로 자립성을 길러서 노예생활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자면 지금 우리들이 의존하고 있는 의료, 교육 시스템부터 철저하게 비판해야 해요. 그리고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대안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안이란 게 별거 아니에요. 오랜 세월 보통사람들이 살아왔던 방식을 회복하면 됩니다. 그러자면 우선 경동시장 같은 곳에 결집되어 있는 지혜를 우리가 적극적으로 되살려야 해요. 요즘 소위 첨단의료기술로 만든 신약이라고 해서 나오는 것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세계 각지의 전통약초를 기초로 한 것들이에요. 그렇게 잔뜩 부채를 지면서 그 민간의 전통을 멸시하고, 모욕을 준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죠. 결국 현대의학도 예전부터 전승되어온 민간의료의 지혜에 기대지 않는 한, 출구가 없는 거예요.

  현대 의학도 결국 이런 식인데, 보통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조상들이 전해준 삶의 기술을 외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삶의 기술이라는 말을 하니까, 생각나는 게 대마(大麻)입니다. 사실 대마라는 게 참 쓸모 있는 풀이거든요. 이게 예전 우리 농촌에도 많았어요. 굉장히 잘 자라고, 섬유질이 풍부해서 옷감이나 종이의 원료로 쓰였어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대마를 가지고 플라스틱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기존 석유로 만든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 물건이니까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만, 대마로 만든 식물성 플라스틱이 실용화되면 그런 환경문제가 사라져요.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이를 소비해요. 이러다가는 조만간 온 세계의 숲이 사라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무슨 대책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도 인류사회는 아직 이러고 있지요. 그런데 대마를 종이의 원료로 하면 돼요. 굉장히 풍부한 고급 펄프가 나와요. 나무는 수십년 자라야 종이원료로 쓸 수 있지만, 대마는 한 계절에 5미터가 넘게 쑥쑥 크는 풀이에요. 그러니까 이 풀을 이용하면 지구를 살릴 수 있어요. 게다가 대마는 우수한 약재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대마초밖에 모르지만, 그 마인(麻仁)이라고 하는 씨는 전통적으로 여러 질병에 요긴하게 쓰던 거예요. 특히 노인들의 메마른 장기를 윤택하게 하는 데 좋은 약으로 동양에서 오래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쓸모를 가진 풀이 마약의 원료가 된다고 해서 극도의 경계대상이 돼버렸어요. 지금 농가에서는 허락 없이 대마를 기를 수도 없고, 예전에는 아무 문제없이 구할 수 있던 마인이라는 약재를 지금은 건재약방에서도 구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대마라고 하면 마리하나 생각을 하고, 이상한 눈으로 봐요. 이게 모두 국가의 논리에 세뇌된 탓이에요. 실제 미국에서 대마초를 불법화한 경위가 굉장히 석연치 않아요. 대마초는 담배보다도 독성이 덜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마초를 피우는 것도 적절하게 관리만 한다면 사람의 건강에 매우 좋아요. 그걸 이용함으로써 당장 여러 가지 질병을 고치거나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있지만, 대마 흡입이 사람들에게 대체로 행복감을 준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좋은 거죠.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주기적으로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꽤 많이 알려졌지만, 그들이 굉장히 생명친화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서로서로에게 관대하고, 별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데에는 대마의 정기적 흡입이라는 의식(儀式)이 상당한 몫을 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행복감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은 아등바등하지 않습니다. 굳이 남을 해코지하면서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어렸을 적에 비교적 행복하게 자란 사람들은 공격적인 심리가 현저하게 덜해요.

  그런데 국가나 자본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면 보통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겁니다.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행복하면 물욕도, 권력욕도, 명예욕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경쟁심도 약해지고요. 자본주의 경제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전제로 합니다. 그 욕망을 부축이는 게 소비문화죠. 만약에 사람들이 남들을 앞서야 하겠다거나 적어도 남들에게 지지 말아야겠다는 욕망이 없어지면 그날로 자본주의는 망해요. 국가도 마찬가집니다. 미국정부가 대마초를 불법화한 데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경위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담배보다도 독성이 현저하게 약한 대마를 불법화한 것은 이게 단순히 마약성분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해요. 그래서 모종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음모론이 맞든 안 맞든 결과적으로 대마의 불법화를 통해서 누가 이익을 보는가 하는 게 중요해요. 굳이 멕시코 하층민 사회에서 사용되던 마리화나라는 속어를 공식명칭으로 채택하면서 대마(hemp)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결국 그것을 불법화함으로써 대마가 갖는 의학적, 문화적, 경제적 가치가 모조리 무시되고 경멸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어요. 아까 대마가 종이나 섬유나 플라스틱의 훌륭한 원료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석유고갈 시대로 접어든 인류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석유는 에너지원일 뿐만 아니라 의복, 약품, 플라스틱 등 요긴한 생활필수품의 원료인데, 그 석유가 고갈되면 문명생활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석유가 하던 역할을 일부나마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대마초만한 게 없어요. 그러면서도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농가의 지속가능한 주요 소득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아직도 대마초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부정적입니다. 인류사회를 위해서 막대한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왜 이럴까요. 현상유지에 의해서 막대한 이익을 보는 세력이 상황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대마는 한 가지 예에 불과해요. 경동시장에서 내가 느끼는 게 그겁니다. 이 엄청난 삶의 지혜, 이 보고(寶庫)를 의과대학 교실에서 배운 게 아니라고 무시한다는 것은 완전히 바보짓이에요. 의과대학이란 기껏해야 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경동시장의 약초는 누천년 동안의 민중적 지혜가 결집된 거예요. 게다가 현대의학은 석유문명 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근본적인 변혁을 겪거나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속가능성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의료체제입니다.

  교육도 의료와 마찬가집니다. 인간생활에 정말 필요하고 학습할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굳이 학교를 다녀야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가정에서 동네에서 거리에서 얼마든지 훌륭하게 습득할 수 있어요. 요즘 우리 아이들이 너나없이 수학 때문에 저 고생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울화통이 터져요. 원래 재능이 있거나 배울 필요가 있는 아이들을 빼고 왜 흥미도 없고 배울 필요성도 못 느끼는 아이들까지 수학공부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지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미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아이라도 수학 못하면 미대 입학이 안돼요. 수학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보람있는 목표라도 사람을 이처럼 괴롭히면서 할 일은 아니지요. 이게 훨씬더 근본적인 윤리예요.

  의료든 교육이든 소위 엘리트들이 구상하는 대로 따라가면 영원히 우리 자신과 아이들을 속박할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 건강도 돌보고, 아이들 교육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훌륭하게 해낼 수 있어요. 그것도 행복하고 재미있게. 혼자 힘으로는 고달프고 재미없지만 여럿이서 함께 우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그 속에서 자식들도 키우고, 생활을 서로 지지하고, 건강도 돌보면서 살면 되는 거예요. 농사도 직접 하지 못하면 농민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하다못해 아파트 베란다에서라도 간단한 채소를 길러 먹으면 되지 않겠어요? 우리들의 제일 큰 밑천은 우애로 맺어진 인간관계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아무 불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복지국가론의 한계



  소위 진보진영에서는 늘 복지국가를 얘기하고 있는데, 저는 어느 정도까지 국가 차원의 복지시스템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전폭적으로 국가의 제도적인 보호 밑에 두는 아이디어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요. 공무원 신분의 사회복지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자질이 좋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국가에서 월급 받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친절은 제도화된 친절인 셈이에요. 어떤 점에서 제도화된 친절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기분 나쁜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게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친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친절의 가장 타락한 형태가 친절을 돈으로 사거나 제도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리치는 기독교의 타락이 여기서 비롯한다고 보고 있어요. 교회가 면죄부를 팔고, 뇌물을 받고, 치부를 하는 데서 타락이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거죠. 초기기독교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행하던 타인에 대한 무상의 친절과 봉사가 로마의 국교가 된 다음에 교회에 의해서 제도화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정신이 타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부인하기 어려운 진실인 것 같아요. 우리가 고달프거나 아플 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별 이해관계가 없는 이웃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거나 인간적인 배려거든요. 어렸을 적에 아픈 배를 만져주던 동네 할머니의 손길이 어떤 직업적인 의료인의 진료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일리치도 자주 언급하지만, 복음서의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깊이 음미할만한 이야기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에 바리새인이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그래서 예수가 들려주는 얘기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은 제 딴에는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학자니까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다 아시는 얘기니까 제가 되풀이하지는 않겠어요. 단, 우리가 보통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그러는데 실제로 성서에는 그냥 사마리아인이라고 돼있지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없다는 거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착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 운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거예요. 통속화시키는 거예요. 아무튼 이 이야기는 사람이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따위 통속적인 윤리를 말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예수의 가르침은 그런 유치한 게 아니에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보통 우리가 이웃, 이웃하는데, 그게 나에게 어떤 실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함축하고 있는 얘기라고 볼 수 있어요.

  자, 이야기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우선 중요한 것은 당시에 사마리아인은 유태인들하고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적이었어요.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와 같은 관계였다고 할 수 있어요. 원래 종족은 같은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 유태인 중의 한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뺏기고 피를 흘리며 길거리에 쓰러져 있단 말이죠. 그런데 같은 유태인인 제사장이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고, 또 율법학자가 지나가면서 못 본 척합니다. 아마 특별히 나쁜 인간이 아니었을 겁니다. 귀찮고 성가시잖아요. 한번 잘못 걸리면 상당한 희생을 치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남의 이목이 없으니 그냥 지나가도 누구한테 손가락질 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었겠죠. 나 같아도 그랬겠어요. 그냥 휴대전화로 119에 신고하고 지나갔을 거에요. 예수의 이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나 자신이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우선 생각해봐야 해요.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그 사람은 지나가다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유태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냥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유태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응급조처를 한 다음 그를 업고 인근의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간호를 하고 필요한 경비를 자기 돈으로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여관을 떠나면서 주인에게 돈이 모자라거든 다음에 들를 때 청구하라는 말까지 남깁니다. 유태인의 입장에서는 생명의 은인이지요. 자기 동포들이 외면한 죽어가는 유태인을 살려놓은 게 그들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는 적일지라도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은 물론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조금 다른 데 있는 것 같아요. 즉 유태인 제사장도 지나가고, 율법학자도 그냥 지나갔는데, 유태인의 적이기도 한 사마리아인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버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도 시킨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이나 규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스템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그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유태인에게 다가간 거예요. 그는 완전히 자산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자신의 이웃을 선택한 거지요. 그러니까 그는 자유인으로서의 자신을 실현한 셈이에요. 그는 유태인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안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행동한 게 아니라, 유태인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도움을 주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도움을 주는 쪽을 기꺼이 선택한 겁니다. 이게 자유인이에요. 그러면 이웃이라는 게 뭐냐, 자유인이 자유의사로 선택하는 존재예요. 그때 내 이웃은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예수의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결국 자유인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야기라고 저는 봐요.

  어떻게 생각하면 복지국가라는 것은 사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서 사람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자꾸 말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국가적 복지시스템이 정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현대국가에서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또 날이 갈수록 가족이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국가 말고 기댈 데가 별로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납세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게 있어요. 국가가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돌보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현대국가의 기초적인 임무이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라는 개념에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과 통제권을 완전히는 아니라 해도 상당부분 국가에 넘겨준다는 뜻이 들어 있어요. 그것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에 불가피한 손상을 초래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보통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에 관해서 말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의 복지시스템이란 것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자치체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코뮨이라고 하는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풀뿌리 지역공동체가 발전하여 지금과 같은 복지체계가 성립된 거예요. 그러니까 세금을 많이 거둬서 국가가 분배를 잘한다는 측면에서만 볼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역공동체가 중심이 된 자치의 전통을 먼저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복지체제지만 그것도 역시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다는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에요. 그러니까 지속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무리 모범적인 것으로 보여도 북유럽 모델도 이상적인 모델은 아니라는 뜻이죠.

  하여간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꼭 좋은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 시스템은 민중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자주적 생존능력을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아까 말한 것처럼 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훼손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게 근본문제거든요. 사실 이 점에서 녹색평론과 우리나라의 여타 진보적인 그룹 사이에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녹색평론이 외로워요. 우리는 가급적 병원에 가지 말자고 하는데, 진보진영에서는 병원과 병상수를 더 늘리고, 가급적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국가가 국민보건에 대한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거든요.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녹색적 삶이란 다른 게 아니에요. 자치, 자립, 자급이에요. 그러나 혼자서는 그게 불가능하고 재미가 없으니까 어울려서 같이 일하고 놀자는 얘깁니다. 전승되어온 삶의 기술과 지혜를 잘 활용하면 민초들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러면 진짜 민주주의도 자연히 실현되고요.





우애를 기반으로 한 농적(農的) 협동의 삶



  그런데 이 모든 게 농촌이 살아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것은 만고의 진리예요. 사람이 땅을 떠나서 살 수는 없어요. 그리고 생태계가 붕괴하는 이 시점에서 새삼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요컨대 성장경제가 아니라 순환경제라야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해요. 그런데 순환경제라는 게 농업 중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잖아요. 뭐 다른 방식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그것도 기업논리로 하는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아니라 철저히 소농이 중심이 되어 땅을 자기 식구처럼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 사람과 그들의 공동체가 뒷받침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녹색평론이 늘 소농과 농촌공동체가 죽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농민과 농촌공동체가 사멸해버린 뒤에도 얼마 동안 사회는 존속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자립성의 근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영구히 노예생활을 면치 못할 게 확실합니다. 

  오늘 제 얘기의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좀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꿈을 버리고, 국가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아예 접어버리고, 우리끼리 살자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행복한 자유인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알게 모르게 수많은 자치적 협동조직이 있고, 또 생겨나고 있는데,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에요. 민중에 의한 협동적인 자치적 결사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권력은 민중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도 이런 결사체들이 많이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실현됩니다. 지금은 공동체도 파괴되고, 가족마저 해체일로에 있습니다. 개인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생존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형국이에요. 상호부조의 네트워크가 없는 사람들은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 오로지 돈벌이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지요. 이걸 국가와 자본이 노리는 겁니다. 국가와 자본의 횡포 앞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더욱더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협동적 결사체가 절실하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국가보다도 옛날 중세 시대가 더 민주적인 시대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길드라든지 직인조합이라든지 하는 결사체들이 많았거든요. 게다가 아직 중앙집권적인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으니까 여러 제후들 사이의 견제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몽테스큐 같은 사상가는 봉건제가 오히려 민주적이라는 얼핏 역설적인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중산층이 두터워야 민주주의가 되는 게 아니라 자주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튼튼한 횡적인 유대가 있어야 민주주의가 된다는 얘깁니다. 이게 중요해요. 밑바닥에서 우리들끼리 엮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지내는 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이 사슬은 역사가 엄청나게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이 근대국가라는 시스템은 사실 강고한 체제예요. 얼마나 영리하고 교활한데요. 게다가 권력, 금력, 무력을 독점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무슨 수로 이길 수 있겠어요. 지배자들의 무기를 가지고 우리가 싸워요? 불가능합니다. 간디가 말한 대로 우리는 철저히 비폭력이라는 무기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폭력이란 다른 게 아니에요. 국가와 자본이 설정한 게임의 룰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포기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 길은 우애의 원리를 기반으로 협동과 연대의 그물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 글은 2009년 12월 8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한 '시민학교 열린 특강'의 하나로 서울 마포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행한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좀 길지만. 공유하고싶어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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